05.08. Paris, France 2006. 8. 2. 00:00

에밀 졸라.

1894년 9월 보불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군부는 패전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희생양 또는 전범을 필요로 했고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지목했다. 유태계 장교 드레퓌스는 그러한 희생양에 적합한 인물이었고,이로 인해비공개 군법회의에서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강제로 불명예 전역된 뒤, 프랑스령 기아나 섬으로 유배당한다. 그런데 2년 뒤, 피카르라는 프랑스군 고위 장교가 우연한 기회에 진짜 간첩을 적발하고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피카르는 한직으로 좌천당하고 드레퓌스에 대한 무죄 주장도 묵살되었다.

1898년 소설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대통령에 대한 공개장을 통해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과 군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함으로써, 프랑스는 일대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되고, 정치가 클레망소, 작가 아나톨 프랑스 등이 졸라와 함께 끈질긴 재심 요구로 군부는 결국 1906년에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된다.

"드레퓌스 사건"은 당시의 유럽 전역을 들끓게 하였는데, 결국 파시즘적 정권이 공작 정치를 통해 진실을 은폐, 호도하고 개인을 억압하는 행태, 또한 그러한 행태에 맞서 싸운 양심적 지식인들의 승리 등을 통칭하는 일종의 일반 술어로 자리잡았다.

당시프랑스 또는 유럽 전역이 양심적 지식인 세력과 수구적 음모세력 또는 반유태주의, 인종차별주의적 세력으로 나뉘어져 갑론을박했고, 그 결과 프랑스 또는 유럽 지성계의 양심이 살아있음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이 지하묘지인 crypt에 알렉산더 뒤마, 에밀졸라 그리고 빅토르 위고와 아래 사진처럼 같은 방에서 영면하고 있다.

1995년 9월 12일자 '리베라시옹'지에 따르면, 드레퓌스 사건 이후 100년만에 처음으로 프랑스군이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는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고 한다. 프랑스군 역사학자 장 루이 무뤼 장군이 프랑스 유태인 중앙 종교법원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한 것이다. 드레퓌스는 1906년에 대법원에 의해 복권되기는 했지만 프랑스군은 당시 군법회의가 음모와 조작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장 자크 루소

프랑스 계몽기의 천재적 사상가로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중국 공산당 직속 언론기관인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는 7dnjf 28일 중국 사회과학원과 함께 ‘근·현대 중국에 영향을 끼친 50명의 외국인’을 선정,발표했다. 생년월일 순으로 나열된 명단 첫 자리는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차지했다










퀴리 부인은 이곳에 모셔진 유일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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